소년-소녀 1-1

노량진 산동네에 높은 돌계단 위에 나무 대문이 열려 있다. 대문 한 귀퉁이에 기대어 앉아 먼 곳을 바라 보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한강 한편에 동그란 파란색 천정을 하고 있는 국회의사당을 바라 본다. 그러다가 다시 한강을 보고 한강 주위에 뼈대만 남은 것 같은 건물 공사장을 본다. 햇볕이 노곤하게 조여 온다. 누나들은 학교엘 갔다. 소년은 다시 국회의사당을 바라 본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 보며 엄마가 이ㅣㅣ을 수영장 건물을 찾는다. 가물 가물. 촘촘히 들어 앉은 건물들 속에 수영장이 있 는 3층 건물이 보이는 것 같다. 소년은 일어 선다. 계단을 풀쩍 뛰어 내려와 달리기 시작한다. 골목길을 달려 내려오고 아파 트 수위실을 지날 땐 전속력을 낸다. 그리고 아파트를 지나쳤을 때 걷기 시작한다. 아파트 수위아저씨한테 모습이 보이면 또 자기를 달랑 들어서 그 까칠 까칠한 수염으로 마구 비벼댈 것이다. 소년은 계속 걸어 내려 온다. 큰 누나가 데리고 가서 도화 지를 사준 문방구를 지난다. 그리고 학교를 지난다. 버스가 달리고 차들이 달리는 찻길로 나온다. 찻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버스가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버스를 쫓아 달리고 싶다. 소년은 달린다. 계속 달린다. 사거리가 나오고 빨간 불, 파란 불. 소년은 또 달린다. 똑같이 생긴 버스가 또 지나 간다. 또 쫓아 달린다. 숨이 차다. 다시 걷는다. 길가에 빨간 문에 빨간 차들이 서 있는 소방서를 본다. 엄마와 버스를 타고 갈 때 보았던 그 소방서다. 소년은 또 달린다. 걷다가 달리다가 한강이 나왔다. 한강으로 갔다. 비스듬한 돌둑을 따라 내려가고 돌둑 밑으로 좁은 길을 다시 달리고 다리에 올라 간다. 다리를 건넌 다. 다리 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강을 내려다 본다. 아 아찔하다. 다시 다리를 따라 건넌다. 여의도에 도착해서 건물을 찾는 다. 이 길이던가? 찻길을 따라 걷는다. 드디어 아파트를 찾았다. 아파트 앞쪽에 있었지. 아파트 주위로 둘러 있는 찻길을 따라 걷는다. 가게가 있고.....찾았다! 소년은 건물 계단을 뛰어 올라 간다. 그때 그 회색 철문이 맞는 것 같다. 문을 양손 으로 돌려 열고 들어 간다.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 옆 카운터에서 고개를 내민다.
"엄마!"
소년은 고함을 질렀다.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놀랜 눈으로 쳐다 본다. 엄마가 제일 놀랜것 같다. 엄마가 카운터 밖으로 나와 쪼그려 앉아 소년의 팔을 양쪽으로ㅗㅗ 잡고 묻는다.
"우째 왔노? 누랑 왔노?"
"내 혼자 왔다."
엄마의 눈이 더 동그레 진다. 아줌마들은 수근대며 엄마 주위로 모인다.
"진짜가? 우째 왔노?"
엄마는 계속 동그란 눈으로 소년을 쳐다 본다.
"버스 쫓아서 띠 왔다."
"이누무 자슥아. 차들 씽씽 달리는데 사고 나모 우짤라꼬 그래 띠 댕기노. 울매나 위험한 줄 아나?"
엄마는 그제서야 일어나서 소년을 내려 본다.
"안 위험하다. 찻길로는 안왔다. 사람들 댕기는 길로만 띠 왔다."
아줌마들이 엄마에게 뭐라고 소근대고 웃고 그러다가 다시 놀랜 얼굴을 하다가 다시 웃고 한다. 소년은 엄마를 봐서 좋았다.
그날 소년은 엄마 옆에 앉아 있다가 어떤 아줌마를 따라 수영장을 구경하다가 아줌마가 사주는 과자도 먹었다. 엄마는 옷을 갈아 입고 소년과 같이 나왔다. 청소하는 아줌마들과 카운터에 같이 있는 아줌마와 인사를 하며 나왔다. 해가 아직 쨍쨍하게 내리쬐는데 엄마 손을 잡고 걷는 소년은 기뻤다. 그날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혼났지만 소년은 뛰고 달리면 아무때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와 같이 걷는 길은 너무나 기뻤다.

때르릉.
선생의 말씀이 끝나고 대청소 시간이 됐다. 아이들은 모두 가방에서 준비해 온 걸레와 왁스를 꺼냈다. 여자 아이들 몇은 창문 에 달라붙어 창문을 닦고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걸상을 책상위에 엎고 교실 뒤쪽으로 죽죽 소리나게 밀었다. 칠판 앞 교단부터 책상이 들어찬 곳까지 열을 맞춰 앉아서 걸레질을 시작했다. 담임 선생은 아이들이 청소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서 반장을 불렀다 . 소년은 뛰어 갔다. 교실문 앞에서 선생은 소년에게 몇마디 하고 교무실로 내려 갔다. 소년은 들어와 아이들한테 얘기했다.
"야. 선생님이 20분 후에 올라올테니 그때까지 청소 다 해 놓으랜다. 우리 노래 부르면서 하자."
친구들 사이로 들어온 소년은 걸레를 잡고 친구들한테 무슨노래를 부를까 물어보고서 하나 둘 셋. 노래가 시작되고 노래에 맞 춰 아이들의 걸레질이 신나게 돌아간다.
푸른 바다 저 멀리 새희망이 넘실거린다
하늘높이 하늘높이 뭉게꿈이 피어난다
노래는 코난에서 은하철도를 타고 천년여왕의 커다란 눈동자로 들어 갔다. 옆반 아이둘이 걸레를 던지며 복도를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다가 소년의 반 문으로 도망쳐 들어오다 그만 문 앞에 있던 아이의 손을 밟았다. 밟힌 아이는 악 소리를 지르고서 아 픔을 참으려고 손을 꼭 모아쥐고 고개를 숙이고 눈도 꼭 감고 꼼작도 못했다. 손을 밟은 아이는 힐끔 쳐다보고는 또다시 장난을 치러 문을 뛰어 나갔다. 노래는 끊어 졌다. 소년은 일어서서 눈물이 막 흐를 것 같은 손밟힌 아이에게 갔다.
"괜찮냐?"
소년은 문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편에서 두 아이는 계속 서로 걸레를 던지며 장난치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이리와봐."
소년은 소리를 지르고 손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복도가 쩌렁 쩌렁 울렸다. 복도 유리창을 청소하던 아이들이 모두 소년을 향해 눈을 돌렸다. 잠시 조용했다. 두 아이는 장난을 그치고 소년에게 다가 왔다.
"야. 너 뭔데 이새끼 저새끼 욕하냐?"
"뭐야 임마."
소년은 다가선 두 아이를 번갈아 쳐다 보고는 말했다.
"니네 ㅁ반이야? 우리 반 애 손을 밟았으면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빨리 사과 해."
한 아이가 소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들었다.
"야. 씨발 손 좀 밟힌거 가지고 무슨 사과야 사과는. 장난 치다가 그럴 수도 있지 새꺄."
"사과 안 하겠다는 거냐?"
"사과 못한다."
꽈당! 퍽퍽! 순식간에 한 아이는 다리에 걸려 넘어지고 한 아이는 배를 움켜쥐고 주저 앉았다. 소년은 일어서려는 아이를 걷 어 차고 주저앉은 아이의 등을 발로 내리 찍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속에 다른 반 두 아이가 달려왔다. 그리고 소년을 둘이서 한 팔씩 잡고 떼어 냈다.
"성원아. 성원아. 참아라. 무슨 일인데? 응?"
소년은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됐다. 됐어. 그만하께."
소년은 반으로 돌아왔다. 반 아이들은 조용히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소년은 숨을 고르고 소리쳤다.
"야. 또 노래부르자."
아이들은 또 노래를 부르며 걸레질을 시작했다. 복도에 몇명의 아이들이 맞은 두 아이를 데리고 자기네 반으로 갔다. 다시 복 도에 교실에 재잘대는 소리, 떠드는 소리, 노래소리로 가득했다. 청소가 끝나고 선생이 집에 가도 좋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은 모두 가방을 들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있어섰다. 손이 밟힌 아이가 소년에게 다가와서 자기 때문에 괜한 일이 벌어졌다고 미안하 다고 했다. 소년은 미안하긴 뭘 미안하냔 말을 툭 던지고 가방을 멨다. 선생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교무실로 따라 내려 갔 다. 소년은 속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혹시 싸움한 것을 혼내려는 건 아닐까? 소년은 내려 가며 선생의 표정을 살폈다. 심하게 혼내려는 것 같은 인상은 아니고 그렇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소년은 가슴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교무실 문을 들어서고 선생은 책상앞에 앉았다. 소년은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선생을 쳐다보며 책상 옆에 섰다. 선생의 말이 떨어지면 고개가 푹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선생은 얘기를 시작했다.
"학교에 육성회라는 것이 있는 거 너도 5학년이고 하니 알거다. 육성회 첫 모임이 다음주 토요일에 있으니 어머님께 여쭤 보고 육성회도 참가 하시라 그러고, 토요일날도 시간 내서 꼭 오셨음 한다고 전해라."
소년은 선생의 말을 듣는 순간 4학년때 6학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엄마와 싸움을 하고 누나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울고 엄마는 이마에 손을 대고 창문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누나가 반장이었으니까 육성회에 가입해야 된다고 엄마한테 얘기했고, 엄마는 그런거 못하겠다고 5학년때 한번 했다가 얼마나 못 볼 꼴 보고 마음만 상했는 줄 나느냐고 말 했다. 다른 학부형들 모두 귀부인처럼 해가지고 나와서는 조금씩 돈 내서 회식이라도 하자면서 하루 이틀 벌까 말까한 돈을 같 이 내자고 그런다고...... 소년은 그 때 알고 있었다. 육성회라는 것이 학부형들이 모여서 돈을 내고 선생들 밥도 사주고 운동 회때 빵과 우유도 준다는 것을. 소년은 두려웠다.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알았고, 매일 아버지와 함께 일나가는 엄마를 학교에 불러 또 그런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이 두려웠다. 소년은 대답했다.
"엄마 토요일에 일나가셔서 못나 올 건데요. 육성회도 아마 못하실 거에요."
머리속에서 스쳐지나간 생각때문에 대답이 불쑥 나왔다. 선생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큰 소리로 얘기했다.
"이놈아. 내가 언제 너 한테 물었냐? 어머님께 가서 얘기를 전하란 말이야. 니가 어떻게 알아서 미리 그런 얘길 해! 건 방지게. 가서 이거 전해드리고 월요일날 방과후에 다시와!"
선생은 봉투를 내밀었다. 소년은 봉투를 두손으로 받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혼나는데 이력이 난 소년이지만 언제나 혼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소년은 계단을 내려와 운동장으로 나왔다. 실내화를 신발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철봉 옆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이 달려왔다. 네명의 아이들은 소년을 둘러싸고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물 었다.
"야. 혼났어? 맞았냐? 아까 그 새끼들이 꼰질렀냐?"
"아냐. "
"그럼 뭐야? 왜 그래?"
소년은 얘기 하기 싫었다. 친구들한테 집안 사정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문제들. 소년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뭐하고 노까?"
"일단 노삼이네 가서 라면 끓여 먹으면서 생각하자."
"그래? 노삼이 니네 라면 있어?"
소년은 노삼이에게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물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에도 꼭 이런 상황이 있었고 그 때도 춘근이 는 노삼이네 라면 먹으러 가자했고 자기는 노삼이한테 라면 있냐고 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야. 성원아. 들어나 봤나 팔도라면 크로렐라."
"야 정말. 가자!"
소년은 계속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팔도라면 크로렐라 같은데. 소년은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야. 우리 여기서 이번처럼 똑같이 얘기한 적 있지않냐?"
노삼이가 소년을 보며 말했다.
"팔도라면 어제 산 건데?"
춘근이가 말을 거들었다.
"꼭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더라. 나도 몇번 그런 적 있었어. 엄마가 그러는데 그건 전생에 있었던 일이래."
소년은 그 대화 마저도 똑같이 경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갈꺼야?"
상호가 얘기했다.
"가자."
다섯명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책가방을 좌우로 흔들며. 교문을 향해 질주 했다.

소년-소녀 2-1
때르릉.
선생의 얘기가 끝나고 청소시간이 되었다. 소년은 학교가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소시간은 더 좋았다. 크게 떠들고 장난도 치고......
아이들은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창문에 붙어 창문을 닦고 했다. 소년은 난로로 갔다. 난로를 감싸안고 있는 보호철에 걸쳐 있 는 목장갑을 꼈다. 난로위에 올려져 있던 주전자를 들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연통을 만져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소년은 매번 하듯이 난로 밑 아궁이를 열었다. 숨을 크게 들이 쉬고 멈춘다음 쇠 갈고리로 석탄을 받치고 있던 철판을 빼냈다. 석탄이 밑 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난로 아궁이로 석탄 재가루가 휙 불어왔다. 재와 먼지 연기가 좀 가라 앉을 때까지 소년은 한발짝 물러 서 있었다. 그리고 작은 삽으로 아궁이에 집어 넣어 석탄재들을 검붉은 양동이에 담았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발간 석탄도 몇개 있었다. 소년은 계속 석탄재를 양동이에 퍼 담았다. 깨끗이 하느라 삽으로 난로 밑둥치 긁는 소리가 여러번 날 때까지 조 그마한 재까지 긁어 냈다. 그리고 아궁이 뚜껑을 닫고 양동이를 집어 들려는데 양동이 밑이 툭 떨어지면서 석탄재들이 교실 바 닥에 쏟아졌다. 아직 꺼지지 않은 석탄에 양동이가 녹아서 떨어진 것이다. 소년은 검붉은 양동이가 불에 녹고 탄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소년은 주전자를 들고 쏟아진 석탄과 늘러붙은 양동이 위로 부었다. 치지직 소리가 나며 김이 올라왔고 계란썩는 냄새와 함께 온 교실에 연기로 가득했다.
"뭐 하는 거야? 왜그래?"
담임 선생이 앞문으로 들어 오며 소리쳤다. 선생은 소년의 옆에 다가오더니 상황을 보고서는 소년의 뺨을 때렸다. 갑자기 소 년의 앞에 불이 번쩍 했다. 소년은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 하다가 중심을 잡고 선생을 쳐다 봤다.
"다 타지도 않은 재를 양동이에 담으면 어떻해 임마. 불 날 뻔 했잖아."
선생은 인상이 잔뜩 일그러져 소년을 무섭게 노려봤다. 소년은 선생을 봤다가 녹아붙은 양동이를 봤다가 하며 작은 소리로 대 답했다.
"양동이가 탈 줄은 몰랐어요."
"모르긴 뭘 몰라 임마. 고무가 불에 탈 줄 몰랐다는 게 말이나 돼?! 어디서 변명이야 변명은."
"정말 몰랐어요. 선생님. 불에 안 타는 양동인줄 알았어요."
"이 녀석이 잘못했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번쩍! 다시 소년의 눈앞에 번개가 치고 소년은 또 쓰러질 뻔 했다. 소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올랐다. 이제는 선생을 바라 보지 못하고 선생의 발만 쳐다 봤다. 당연히 석탄 담는 양동이는 불에 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소년은 서러운 감정에 눈앞 이 흐려졌다. 선생은 목소리를 조금 가라 앉히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인정을 하고 반성하고 뉘우치 고 잘못했습니다 해야지 모른다고 핑계대고 변명이나 하고 ...... 빨리 쓸어 담아. 깨끗이. 따라 내려와서 새 양동이 받아 가! 소년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양철 양동이를 받아 와서 바닥을 삽으로 박박 긁어 담으면서도 계속 서러운 생각만 들었다. 선생님은 왜 철 양동이도 있는데 하필이면 고무양동이를 우리반에 갖다 놨을까. 정말 탈 줄은 몰랐는데......
다른 아이들 모두 돌려 보내고 소년만 남아서 청소를 하고 꾸중을 들었다. 다시는 그런 잘못 하지 말고 잘못했으면 변명따위는 하지 말라고. 소년은 입에서 맴도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교실을 나왔다. 선생님 왜 우리반만 고무 양동이였어요? 계속 머리속에서만 말이 맴돌았다. 소년은 운동장으로 나왔다. 철봉 옆에 기다리던 친구들이 달려 왔다. 네명 의 아이들이 소년을 둘러싸고 물었다.
"성원아..... 또 맞았냐?"
"아냐."
아이들은 소년의 눈치만 살폈다. 소년은 자기 때문에 친구들이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것이 싫어 오히려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
"오늘은 뭐하고 노까?"
"일단 노삼이네 가서 라면 끓여 먹으면서 생각하자."
"그래? 노삼이 니네 라면 있어?"
소년은 노삼이에게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물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에도 꼭 이런 상황이 있었고 그 때도 춘근이 는 노삼이네 라면 먹으러 가자했고 자기는 노삼이한테 라면 있냐고 물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야. 성원아. 들어나 봤나 팔도라면 크로렐라."
"야 정말. 가자!"
소년은 계속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팔도라면 크로렐라 같은데. 소년은 아이들을 보면서 물었다.
"야. 우리 여기서 이번처럼 똑같이 얘기한 적 있지않냐?"
노삼이가 소년을 보며 말했다.
"팔도라면 어제 산 건데?"
춘근이가 말을 거들었다.
"꼭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더라. 나도 몇번 그런 적 있었어. 엄마가 그러는데 그건 전생에 있었던 일이래."
소년은 그 대화 마저도 똑같이 경험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안갈꺼야?"
상호가 얘기했다.
"가자."
다섯명의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신발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책가방을 좌우로 흔들며. 교문을 향해 질주 했다.

소년-소녀 1-2
4교시였다. 국어시간이고 담임 선생은 아이들이 의견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친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친구 사이는 어떤 사이이고 어떤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냐고 선생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별 말이 없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서로가 발전할 수 있게 하는......같이 달리기를 할 때 앞에서 뛰고 뒤에서 쫓고 하는.....경쟁! 그래, 경쟁관계다.
소년은 손을 높이 들었다.
" 얘기해봐라. "
선생의 지명을 받고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좋은 사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사이가 좋을 것 같아요."
소년은 앉았다.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처럼 들떠서 선생의 평가를 기다렸다. 선생은 소년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 다.
"어떻게 친구사이를 경쟁이라는 말로 표현하니? 경쟁은 좋지 않은 말 같지 않니? 친구 사이에 경쟁이 뭐니? 경쟁이. 친구들을 매일 이기려고 생각하고 그러니? 어릴때부터 생각을 곱게 가져야지. 그렇게 생각해선 않된다."
소년은 뺨을 맞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을 적으로 생각한다고 알겠 지. 그게 아닌데. 날 약아빠진 놈으로 볼거야. 왜 내 입에서 그런 약아빠진 말이 나왔지. 소년은 그 다음 선생의 말도 아이 들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벌게진 얼굴을 들고 싶지 않았다. 4교시 수업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지 . 소년의 머리엔 경쟁이라는 단어와 선생의 그 경멸하는 눈초리만 교차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앞에 앉아있던 춘근이와 노삼이가 뒤로 돌아서 도시락을 꺼냈다. 소년이 축 쳐져 있는 것을 두 아이는 밝 은 분위기로 바꾸려고 애써 다른 얘기를 했다. 소년도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지었고 다른 얘기들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이 남자 셋, 여자 셋 편을 갈라 공기 시합을 붙었다. 소년은 최고 선수였다. 어릴적 누나들과 함께 놀았으 므로 보통 여자애들보단 훨씬 잘 했다. 여자 편에는 소녀가 있었다. 공기돌을 뿌리고, 하나 하나 던져서 집고, 둘씩 집고,... 마지막에 손등위에 올려놓고 던져 잡고...... 공기를 하면서 소년은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기분도 예전처럼 돌아왔고. 결국 남자편이 30년을 먼저 내고 이겼다. 으스대는 남자애들한테 소녀가 말했다.
"니네 눈싸움 잘 하니? 나랑 눈싸움 한번 하자."
소녀는 말하며 소년을 바라 봤다. 소년은 그래 하며 다가 앉았다. 눈싸움이 시작됐다. 소년은 소녀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 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여자애들은 소년의 눈을 감시했고 남자애들은 소녀의 눈을 감시했다. 아이들 입에서 둘다 정말 대단 하다라는 말이 나왔다. 소년은 꼼짝않고 소녀만 바라보았다. 소녀의 큰 눈은 굉장히 깊어 보였다. 4학년대도 같은 반이던 소 녀를 이렇게 계속 쳐다보고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소녀가 참 예뻐졌다는 생각을 했다. 소녀의 눈동자에 파묻혀 이런 저런 생 각을 하다가 소녀의 눈가를 봤다.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기는 점점 많이 고였다. 그러더니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입술로 쪼르륵 흘러내렸다. 소년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촛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눈에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언젠가 꼭 이런 상황에서 본 것 같은 저 모습. 언제였을까?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눈물이 흐르는데도 소녀는 소년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코 소녀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눈을 크게 한 번 깜박이고 말했다.
"졌다...... 눈물이나 닦아라."
소년은 교실을 나왔다. 웬지 모르게 서글퍼져서 울고 싶어졌다. 소녀의 눈물을 보자 자신도 눈물이 막 쏟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와 수돗가로 갔다. 세수를 했다. 소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학교 끝나고 놀다가도 시 간이 되면 밥하러 집에 가는 소녀의 모습. 그럴때면 보이던 그 야릇한 안타까움과 서러움의 표정이 자꾸 아른 거렸다.
수업시간에도 소년은 앞쪽에 앉아있는 소녀를 쳐다봤다. 가지런한 단발머리, 노란 반팔에 하늘색 멜빵치마, 가늘지만 강해 보 이는 손과 팔. 소년은 물끄러미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6학년 겨울이 다 되갈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장위동 뒷산 공터에서 야구를 하기로 했다. 야구 글러브 있는 친구들 것을 모두 빌리고 공도 세네개를 준비해서 갔다. 자주 할 수 없는 놀이라서 아이들은 모두 재미있어 했고 해질 때까지 놀아야지 하는 생각 을 모두 하고 있었다. 한참을 재미나게 놀다가 소년과 한 아이가 아웃이다 아니다 하면서 말다툼이 시작됐다. 그러다가 소년이 '자꾸 우길래 새꺄'하면서 그 아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맞은 아이가 고개를 돌려 소년을 쳐다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 여 있었고 곧 주르르 흘렀다. 순간 소년은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이의 얼굴과 소녀의 얼굴이 교차되었다. 부끄러움이 솟았다. 소년은 미안하다고 그 아이한테 할하고 먼저 간다며 집으로 달렸다. 산길을 계속 달렸다.
가쁜 숨을 고르며 마당으로 들어 섰고 반지하 방문을 열었다. 방은 어둑어둑하고 눅눅했다. 소년은 구들 아랫목에 있는 담요 밑으로 발을 넣었다. 양은 밥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밥통을 끼고 담요속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자꾸 얼굴이 떠올랐다. 원망의 눈초리 그 눈초리를 타고 돌다가 흘러내리는 눈물. 소년은 자꾸 되뇌였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 까. 오늘이 다시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아침에 일어나고, 다시 학교를 가고, 다시 야구를 하고, ......그러면,
그러면......

소년-소녀 2-2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소년은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축구를 했다. 눈이 얼어서 운동장이 빙판이 되어 있 었다. 아이들도 별로 없고 소년은 친구들과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축구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어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왔다. 소년은 계단을 오르며 파카를 벗었다. 몸에서는 김이 났고 얼굴과 등줄기엔 땀이 흘러 내렸다.
소년은 교실 앞문으로 들어섰다. 교실 뒷편 창가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항상 북적대고 조그만 것에도 웃음을 참지 못해 하루종일 웃곤하는 국민학교 시절 소년도 역시 그런 구경거리를 그냥 지나 칠 수 없 었다. 소년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둥그렇게 둘러싼 아이들을 비집고 처다보았다. 소녀와 남자아이 하나가 눈싸움 을 하고 있었다. 소녀와 남자아이 둘 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로 쳐다 보고만 있었나 보다. 짓궂은 아이 하나가 소녀의 앞쪽에서 소녀를 웃기려고 손으로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혓바닥을 내기도 했다. 소년은 그 아이를 말렸다.
"야. 싸움인데 정정당당히 해야지."
그러나 소녀는 그 아이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체 계속 앞에 앉은 남자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눈을 보았다. 소녀의 눈은 촛점이 없어 보였다. 아니 촛점이 눈동자 깊숙한 어느 곳에 숨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소녀의 눈 은 마치 교실 전체를 삼킬 것 같이 점점 퍼지는 것 같았다. 소녀의 눈 밑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소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차오르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소년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촛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소 녀의 눈에서 불을 타고 흐르는 눈물. 언젠가 꼭 이런 상황에서 본 것 같은 저 모습. 언제였을까? 소녀의 저 깊은 눈과 눈물.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녀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도 계속 앞에 아이만 보고 있었다. 앞에 있던 남자 아이가 더 이상 못참겠는지 벌건 눈을 꿈뻑 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와 하며 소녀를 존경하듯 쳐다 보았다. 소녀 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교실을 나왔다. 세수하러 가는 모양이다. 소년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계속해서 머리속에 소 녀의 눈이 떠올랐다. 빠질 것 같은 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웅덩이 같은 눈동자.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세 상에 맞서는 것 같은 눈. 자꾸 그 눈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이 수업을 시작했는데도 머리속에 그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감을수록 더욱 또렷이 쳐다보는 소녀의 눈이 보였다. 소년은 눈을 뜨고 앞에 앉은 소녀를 쳐다 보았다. 소녀는 왜 그렇게 서글픈 눈을 하고 있을까? 소년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서글픔 같은 것이 계속 일렁거렸다. 소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애서 달랬다.

성원 1-3
91년 봄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성원이는 학생회관 계단을 올랐다. 계단 위에 수위아저씨가 쓰레기가 가득 담긴 검은 비닐 을 양손에 세자루씩 들고 계단을 내려 오려 하고 있었다. 성원이는 달려가 한손에 드신 쓰레기 자루를 받아 들며 인사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응, 그려. 오늘은 일찍 왔네."
"오늘부터 신입생들 몰려 올텐데 저희도 준비해야죠."
학생회관 현관 옆에 있던 쓰레기 자루들을 아저씨와 같이 쓰레기장에 버린 성원이는 계단을 올라와 3층 자판기 앞에 섰다. 100 원짜리 동전을 넣고 밀크커피를 가볍게 두드렸다. 타라락. 쪼르르. 웨엥.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4층으로 올 라갔다. 농악대 문을 열었다. 탁한 온기가 느껴졌다. 칙 하는 스팀소리도 났다.
정진이와 보은이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직 세수를 하지 않은 것같은 정진이가 성원이를 보고 인사를 했다.
"어. 일찍 왔네."
"형은 여기서 잤어?"
"아니. 아침에 나왔지."
"세수 않한 것 같은데."
"어 했는데."
정진이는 성원이의 말을 듣고는 턱과 볼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가만히 있던 보은이가 또 인사를 하고 성원이도 인사를 했다. 성원이는 가방을 쇼파에 던져놓고 커피를 책상위에 올려 놓고 4층 아주머니방으로 갔다. 아주머니는 장판위에 누워 있었다. 성원이는 인사를 하고 대걸레를 두자루 들고 나왔다. 정진이와 보은이가 쓸고 난 자리를 성원이는 걸레로 밀었다. 책상 밑, 쇼 파 밑, 악기장 앞을 쓸며 청소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정진이와 보은이, 승영이가 열심히 청소를 했겠 구나 싶었다. 바닥을 다 닦고 걸레를 들고 아주머니 방에 가서 물에 걸레를 빨았다. 시커먼 검정물들이 흘러내려 하수구로 빨 려 드러갔다. 후배들이 들어 오면 어떤 얘기를 해 줄까 생각하며 걸레를 반복해서 빨았다.
"고만 됐어. 나중에 또 빨아야 하니까 올려 놓고 나가."
너무 오래 빤다 싶었는지 아주머니가 말했다. 성원이는 걸레를 올려놓고 다시 농악대로 들어왔다. 보은이는 담배를 물고 신문 을 펴 보고 있었고 정진이는 악기장에 있는 악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원이는 정진이 옆에 앉으며 식은 커피를 한모금 마셨 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정진이가 씩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준비도 안ㄷ 새끼들이 후배는 되게 받고 싶은 모양이다."
세사람은 서로를 돌아 보며 웃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성원이는 무릎에 박은 철핀을 뽑는 수술을 했다. 연말연시와 새해 휴가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준협이의 집에서 했던 합숙세미나. 모두가 준비를 제대로 안한 상태여서 아침에 일어나 서 같이 책읽고 오후에 읽은 부분을 세미나 하고, 그렇게 계획한 목표량에는 많이 못미치는 양이었지만 성원이는 그것이 너무 좋 았다. 그리고 세미나 마지막 날엔 89들이 모여서 재범이 머리를 깎아주고 재범이는 그렇게 군대를 갔다. 그리고 1학년은 승민 이와 단 둘이 갔던 겨울전수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가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모였다. 그리고 신입생 맞이 준비를 한 다고 이것 저것 도화지에 글을 적고 꾸미고 해서 청테이프를 한손에 들고 맡은 장소에 붙이러 다니고 응원오리엔테이션에 판굿을 공연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셋은 또 아무말 없이 앉아서 각자의 일을 했다. 정진이가 악기를 치자고 해서 성원이는 쇠를 잡았다. 그래. 풍물소리가 둥둥 울리고 그래야 어슬렁 거리던 91신입생들도 문을 열고 들어오겠지. 문을 살짝 열어놓을까. 들어오기 쉽게. 생각이 여기에 이 르러 성원이는 농악대실 문을 슬적 열었다. 밖에서 노래얼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풍물을 치면 노래얼에 방해가 되겠 지. 성원이는 문을 다시 닫았다. 문을 닫고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기왕 들어올 놈들이라면 열려있는 문 말고 꼭 잠 겨진 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들어와야지.
성원이 보은이 정진이 이렇게 셋이 열심히 자진모리를 몰아가는데 농악대 문이 열렸다. 셋이 모두 가락을 뚝 끊었다. 승영이 였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느늦었습니다."
승영이는 빨던 담배를 손에 들고 멋적은 듯이 흔들어 대며 인사를 했다. 정진이가 들고 있던 북채로 북통을 딱 치며 얘기했다.
"에이, 신입생인줄 알았잖아, 승영아."
다시 가락을 치기 시작했다. 갠지갱을 돌고 휘모리로 몰아 가락을 맺었다. 정진이가 다른 것 또 치자고 해서 이번엔 영산을 쳤다. 영산을 다 맺어도 신입생은 들어 오지 않았다. 악기를 놓아두고 쇼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철문 에 똑똑 소리가 났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한명이 들어왔다. 붉은 색 체크무늬 잠바에 베낭을 양쪽 어깨에 굳게 매고 안경을 낀 신입생이었다.
"저 신입생인데요. 동아리 들려고 하거든요."
"응 그래요. 이이리 앉아봐요."
승영이가 또 손을 흔들며 맞이했다.
"89학번 서정진입니다."
정진이가 손을 내밀었다.
"91학번 철학과 오광석입니다."
안경속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승영이는 광석이에게 먹고싶은 것 다 말하라고 허풍을 치고 식당으로 달려 갔다. 과 에 대한 얘기, 동아리에 대한 얘기, 풍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성원이는 엘범을 꺼내 광석이에게 보여 주었다. 농악대 생활을 한장면 한장면 모자이크 해 놓은 것 같은 사진들을 바라보는 광석이의 눈동자는 좌우로 돌아가고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수업 마치고 저녁때 오겠다고 말하며 농악대를 나갔다. 가슴이 설레어 성원이는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몰랐다. 드디어 성원이게게도 후배가 생긴 것이다.
저녁이 되어 술자리가 벌어졌다. 한잔씩 돌리고 광석이에게 노래를 시켰다. 광석이는 일어나서 숟가락을 손으로 잡더니 입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
말없이 바라보는 이름모를 소녀
밤은 깊어 가고 산새들은 잠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요한 연못속에
달빛 젖은 은빛 물결 바람에 이누나

와! 선배들의 짓궂은 함성과 함께 엥콜이 터져 나왔다. 광석이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한 번 웃고는 얘기 했다.
"그럼 한 곡 더 하겠습니다."

...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노래는 점점 흐르고 소녀는 울음 참지못해
밖으로----- 나가버리고

와!! 밖으로-- 하는 부분에서 광석이는 너무나 열정적으로 불렀다. 누구는 머리를 쥐어 뜯기도 하고 누구는 책상을 두드리기 도 하면서 모두 그 부분에서 광분했다. 선배들은 앞을 다투어 광석이에게 술을 권했다. 광석이는 술을 받자마자 꿀꺽 삼키고 다시 권했다.
"근데 뭐뭣때문에 농악대 들어왔냐?"
승영이가 물었다.
"응원오리엔테이션 때 앞에서 풍물치는 걸 봤거든요. 그때 그 소리가 가슴에 팍 와 닿았어요. 꽹가리 소리가 머리를 막 흔드는 것 같았어요. 그 때 느꼈죠. 그래. 저거다.....그래서 들어온 거에요."
또박 또박 광석이는 너무도 야무지게 얘기했다.
"우와. 꽹가리 소리가 머리를 쥐어 흔든데. 성원아."
정진이가 웃으며 성원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광석아. 그 꽹가리 내가 쳤다. 쥐기주드나?"
성원이는 뻐기듯 말했다.
"맨 앞에서 꽹가리 치던 사람이 형이었어요?"
광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원이를 쳐다 보았다. 성원이의 눈에 광석이의 눈이 한아름 들어 왔다. 언젠가 꼭 이렇게 앉아 마주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술잔이 돌아가고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고 모두 농부가를 부르며 자리를 파했다. 광석 이와 성원이는 같이 학생회관을 나왔다. 성원이가 물었다.
"너 집이 어디라 그랬지?"
"인천이요."
"그럼 같이 전철타고 가면 되겠구나."
"형은 집이 어딘데요?"
"난 구로공단이야. 신도림에서 갈아타면 되지."
"친척 집이에요?"
"아니. 집이 서울이야."
"어. 형 고향이 시골인줄 알았는데."
얘기하며 광석이는 씩 웃었다.
"야. 내가 촌놈같이 보이냐?"
둘은 웃었다. 웃다가 광석이가 성원이의 팔을 잡고 끌며 말했다.
"형 제기역으로 갑시다."
그래. 언젠가 이랬던것 같다. 이렇게 광석이가 내 팔을 잡아 끌며 제기역으로 가자고 했던것 같아. 성원이와 광석이는 제기 역으로 걸어가며 걷다가 얘기 하다가 걷다가 얘기 하다가 했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그렇게 첫날이 갔다.

성원 2-3
91년 봄.
성원이는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2년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 했는데 그해 봄 모두들 흔 들리고 있었다. 상쇠는 가정사정으로 고향집에 내려갔고, 2학년 선배가 되는 90학번 가운데 승민이는 성적문제로 휴학을 해야 할 판이고, 민식이는 난데없이 공부를 한다고 나돌고, 여기에 보은이는 농악대를 한달 쯤 떠났으면 좋겠다고 파업을 하고 있었다 . 정진이와 승영이 그리고 성원이가 계속 농악대를 지탱하고 있었다. 91학번 후배들은 많이 들어왔다. 광석이, 호준이, 형선 이, 태호, 그리고 나이많은 태구형.
오후가 되어 농악대 방은 북적댔다. 성원이는 악기를 꺼내서 새 소창을 달고 있었다. 정진이는 민복을 꺼내서 윗도리 아랫도 리 짝을 맞추고 있었다. 총무 승영이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손에는 풍선과 매직 그리고 방명록이 있었다.
"야, 구구일들 몇명이야. 우린 내내려가서 지하식당 치장 좀 허자."
승영이가 91학번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신입생이 농악대로서 첫 출발을 알리는 자리인데 선배들도 많이 와서 축하해 줘야 할텐 데 생각하며 성원이는 북에 소창을 묶었다.
"성원아, 내가 소창묶으께 니가 민복챙겨라."
정진이가 말했다.
"그래요."
성원이와 정진이는 역할을 바꿨다. 보은이는 창기와 고사춤 준비한다고 탈패실에서 계속 연습하고 있었다. 악기에 소창을 다 묶은 정진이와 성원이는 지하식당으로 내려 갔다. 승민이 인철이 재희까지 모두 신입생들과 달라붙어 삼색띠를 붙이고 풍선을 불어 천정과 벽에 붙이고 있었다.
"승영이는?"
정진이가 인철이에게 물었다.
"88들하고 고모집에 고사상 준비하러 갔다."
성원이와 정진이도 같이 치장을 했다. 고사상을 준비하러 갔던 승영이와 88학번들이 술과 고사떡과 과일들을 사왔다.
"올라가서 옷입고 시작하는게 어때야?"
정진이가 성원이를 보며 물었다.
"그래요."
성원이는 신입생들을 불러 올라가서 옷입자고 말하고 농악대 방으로 올라갔다. 신입생들은 옷을 받고 모두 설레이는 모양이다. 민복은 작은 것, 큰 것 몸에 잘 맞는 것이 없었다. 너무 빳빳해도 굳어 보이고 너무 부드러워도 후줄근해 보이고 싸구려 농민 복이 몸에 맞지도 않아 볼품없어 보였다. 처음에 저렇게 몸에 맞지도 않고 어려워도 그 민복을 몸에 맞게 곱게 입을 수 있는 방 법을 깨쳐 나갈 때가 되면 너희도 선배가 되어 있겠구나 생각하며 성원이는 상모를 썼다. 광석이가 성원이에게 다가 왔다.
"성원이형, 대님 좀 매 줘요."
성원이는 의자를 하나 앞당겨 놓고 광석이에게 다리를 올리라고 했다.
"이 쪽은 내가 매 줄테니까 잘 보고 저 쪽은 니가 매."
광석이의 오른쪽 발목에 소창을 잘라 만든 대님을 매어 주며 성원이는 설명을 해 주었다.
"안 쪽 발목에 재봉선을 맞추고...이렇게 발 뒤 축에서 접어서...바깥쪽으로 돌려 매는 거야. 대님 맨 위쪽이 좀 치렁치 렁 해야 폼이 나니까 바지는 최대한 밑으로 내려서 허리끈을 매고."
광석이는 고맙다고 하고 왼쪽을 매기 시작했다. 혼자서 대충 훌쳐 맸던 호준이도 다가와서 부탁한다.
"형 나도."
"야. 다 와봐."
신입생들을 모두 불러 대님 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성원이는 상모를 고쳐 썼다. 신입생들은 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묶었다. 선 배들이 하나씩 달라 붙어 신입생들의 색띠를 묶어 주었다. 그리고 모두 악기를 맸다. 신입생들은 모두 북을 잡았다.
"자 오늘 신나게 치자."
정진이가 북을 맨 신입생들 앞에서 얘기했다. 농악대 방에서 짧게 휘모리를 몰아 치고 길굿으로 돌벤치까지 갔다. 일찍 나온 경로당 선배들이 따라 갔다. 돌벤치에서 길굿을 마무리하고 당산나무에 절을 하는데 준협이가 돼지머리 대용으로 쓰였다. 주위 의 사람들은 오늘은 돼지머리 대신 소머리가 올랐다고 농담을 했다. 덕담을 마치고 서서히 식당으로 들어왔다. 이미 준비한 자 리에 몇몇의 선배가 보였다. 길놀이와 고사가 끝나고 신입생들의 공연 시간이 되었다. 짧은 북춤을 추는 동안 어색하지만 흥을 끌어 올리려는 신입생들의 마음은 넘쳐 흘렀다. 신입생들은 짧막하게 자신들이 농악대에 들어 오게 된 연유를 촌극으로 펼쳤다 .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들의 얘기를 숨김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공연들은 감동적이고 재미 있었다. 촌극의 마지막에 뻔장 광석 이가 앞으로 나와 준비한 종이를 펴더니 굵고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읽어내려 갔다.

91년 농악대 신입생의 글

내 할머니가 사셨고 또한 내 어머니도 사셨던 서러운 이 땅,
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 땅이 조국인 우리.

거름내 나는 이 땅의 농산물을 먹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지극히 한국적일 수 밖에 없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쇠소리, 징소리, 장구소리, 북소리,
사물이 어우러져 흐르는 풍물소리에 우리의 심장은 가락에 따라 박동을 달리하고
들썩들썩 어개춤이 절로 나는 것이다.

대학에 첫 발을 디딘 후 그 어리둥절함에서 우리가 처음 찾은 것은,
바로 내 몸의 소리이다.
여태껏 잊고 지내왔지만 여전히 피속에 녹아 흐르는 그 소리,
그렇다. 그 소리를 따라 우리는 주저없이 농악대의 문을 두드렸다.
풍물소리에 신이나 더덩실 춤을 추면서도 보기도 듣기도 말하기도 차단당했던
우리들이 느끼는 이 알수 없는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머니가 몰래 흘리던 그 눈물은 비단 어머님만의 눈물이 아님을
이 땅에서 고통받는 모든 어머니들의 눈물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가 사는 이 땅의 현실이 나의 존재와 역할을 규정한다.

수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 흘리셨던 눈물로 젖은 이 땅을 힘차게 딪고서
북을 울리며 나아가고자 한다.

지금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확고한 신념하나
내 뜨거운 피에 맹세코 절대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으며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아는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를 사랑할 것이다.

너무나 우렁찬 목소리여서 마치 총학생회장이 투쟁결의문을 낭독하는 것 같았다. 선배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경탄했다. 다같 이 풍물을 치고 고모집으로 뒤풀이를 갔다. 고모집에서 선배들은 후배들 기죽이기를 시작했다. 누구는 목소리가 작고 누구는 풍물칠때 발걸음이 틀리고 누구는 너무 뻑뻑하고 떠드는 소리, 술잔 부딛치는 소리, 고모가 주전자로 술통에 술따르는 소리로 가 득했다. 그런데 광석이가 갑자기 일어났다. 숟가락을 굳게 잡고 입에 대고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 나는 대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농악대가 된것이 좋다. 선배들도 모두 좋아보인다. 뭐 이런 얘기였다. 그런데 그 얘기를 우렁차게 10분을 넘어 연설을 했다. 기를 죽이려던 선배들 모두 기가 꺾였다. 모두가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 이었다. 그리고 광석이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소리를 들으며 성원이는 눈을 감았다. 됐다. 됐어. 그래 이젠 됐어.
눈을 뜨니 햇살이 창을 통해 비추고 있는 여인숙 방이었다. 성원이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광석이, 호준이, 정진이가 옆에 자고 있었다. 목이 탔다. 주전자 물을 입으로 벌컥벌컥 들이 부었다. 광석이의 노래밖에 어제 술집에서의 일은 생각나지 않았 다. 머리도 지끈 거렸다. 다시 누웠다. 멋진 후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삐거덕 거리던 농악대가 이 멋진 91학번을 중 심으로 다시 활기를 찾겠구나 생각하며 누워있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기들 생활에서 대동제, 농활로 마구 치닫고 있었다. 어머니 병환으로 근심많은 승영이, 군에 가게 될 승민이, 농악대는 점점 자신을 갉아 먹어간다는 보은이, 말도 않하고 왔다 갔다 사라지는 민식이, 나가버린 은영이, 은주......동기들 얼굴이 계속 지나가는데 승영이가 문을 열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성원이는 하염없는 공상 속에서 눈을 떴다. 승영이는 성원이에게 사람들 깨우라고 말하고 옆방으로 갔다. 옆방에서 또 승영이 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고 누워 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부석부석 이불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이렇게 눈을 뜨고 다시 고모집으로 향했다. 고모집 문을 열자 시원한 콩나물국 냄새가 확 코로 들어왔다.
"어 배고프다. 고모 밥 주세요."
정진이가 손으로 배를 쓸어내며 말했다. 부엌에 있다가 나온 고모는 두리번 거리다가 들어오는 광석이를 보고 말했다.
"어제 이 눔이 얼마나 크게 떠들던지.....너 목 안쉬었냐? 신입생이라더니 아주 걸출한 놈이 들어왔어. 응."
그리고는 성원이를 보고 말을 이었다.
"아 그래 니눔은 선배랍시고 거기서 같이 떠들어? 고래 고래 노래 부르고.....충식이 형이랑 느이 졸업한 선배들 끽소리 못하고 있다가 기냥 간거 알어?"
성원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앉았다. 그랬구나. 역시나 또 개가 되어 떠들고 소리치고 ... 얼마 안 먹었는데 머리가 아프다 했더니. 정진이가 성원이를 보며 말했다.
"생각 안나지? 그럴거 같더라. 계속 떠드는게 술이 ㅊ구나 싶드라."
성원이는 생각했다. 자신의 일을 자신은 모르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자신의 인생에 자 신이 모르는 자신이 있어 그렇게 얘기하고 술먹 그러고 지낸다는 생각을 하니 재미있었다.
"나 어제 술을 많이 먹은 거 같아요. 그렇게 많이 얘기 했단 말야."
광석이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얘기했다. 성원이가 광석이를 보며 거들었다.
"광석이 너 농악대 뻔장이 아니라 전대협 뻔장해라. 전대협 뻔장."
광석이가 성원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제 형이 그런 말 하지 않았나. 형 아니었어요?"
고추가루가 풀어진 콩나물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모두 후루룩 후루룩 침과 함께 콧물까지 삼켰다. 밥을 먹고 올라와 농구를 한 게임 하고 농악대 방을 청소하고 모두 피곤을 달래려 집으로 갔다. 광석이가 문을 열고 인사하며 나가려했다.
"저 갈께요."
"집에 가니?"
성원이가 물었다.
"예."
"그럼 같이 가자."
둘은 학생회관 계단을 걸어 내려 왔다. 광석이가 성원이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제기역으로 갑시다."
그래. 언젠가 이랬던것 같다. 이렇게 광석이가 내 팔을 잡아 끌며 제기역으로 가자고 했던것 같아. 광석이와 성원이는 제기 역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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